복음에서는 한 여인과 예수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지요?여자는 사마리아인이고 예수님은 사마리아인과는 원수지간인 유다인,
유다인은 사마리아인에게 저 족속은 지옥의 땔감으로 쓸 자격이 없다고 할 정도예요.
그런데 이 여자는 여섯 남자와 사귀었고 지금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고 나오죠?
얼마나 삶은 상처투성이이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겠어요?
얼마나 무시당했으면 주위사람 눈을 피하기 위해서 햇볕 쨍쨍 내리쬐는 오후에 물 길러 왔겠어요?
그런 여인이 야곱의 우물로 육신의 물을 먹으러 왔다가 영혼의 물을 먹게 되는 드라마틱한 장면이나오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우물은 무엇입니까?
땅에서 나오는 물을 모아두는 곳입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과 죄 많은 여인이 만나신거지요.
이 세상의 물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고, 상징성이 있고, 영혼의 물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물을 통해 영혼의 물로 이어집니다.
‘인간은 물이다’라고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은 엄마뱃속에는 99%, 태어나서는 90%, 성인은 70%, 죽을 때는 55%가 물 이라합니다.
에모토 마사루는 책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에서 ‘물은 사람의 감성을 읽고, 글도 읽고 그 내용에 따라 반응도
달리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물에 성질을 부리고 화를 내면 물의 결정이 찌그러지고 깨지는데,
반대로 칭찬하고 예뻐하면 그 결정체가 아름다워지고 균형이 잡혀진대요.
그래서 물을 마실 때마다 ‘고맙다’ ‘사랑한다’ 하면 좋은 물로 바뀐대요.
아무리 소독약을 탄 수돗물이라도 고맙다는 말에 약수가 되고, 아무리 좋은 암반수라 하더라고 분노하며 먹으면 독이 된대요.
여러분들 화났을 때 물먹어도 체한다는 말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오늘 우리들은 세상의 많은 물들을 영적인 측면에서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제가 책에 썼던 이야기입니다.
물은 분명 부드럽고 정화의 기능이 있고 하향성과 적응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에게 겸손과 인내와 끈기와 자기극복과 집중력을 배우게 됩니다.
물은 긍정적인 의미의 물이 있고 부정적인 의미의 물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의 첫 번째 물로 낙수(落水)가 있습니다.
낙수는 추녀 끝에서 똑똑 떨어집니다.
한 곳에 집중으로 떨어지는 물은 세월이 지나면 돌을 파냅니다.
그 무슨 힘이 있겠나 싶지만 세월이 지나면 반드시 흔적을 남깁니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인내심을 갖고 희생과 기도를 할 때 우리도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오로지 주님만은 쳐다보며 우직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에 요령이라는 것이 필요 있을까?
우리가 매일 드리는 묵주, 십자가의 길, 하다못해 밥을 먹을 때 긋는 성호같이 일상적인 작은 하나까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천상의 빗장을 여는 아주 중요한 영적 훈련입니다.
낙숫물처럼 똑똑. 힘도 없어 보이지만, 분명히 천국의 문을 열겁니다.
두 번째로는 유수(流水)가 있습니다.
물은 모이면 흘러갑니다.
흐르는 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수신(修身)의 자세입니다.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것입니다.
다듬어진 나의 모습을 통해서 다른 이들이 편함을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흐르는 물처럼 계속 자신을 갈고 닦을 때만 가능할 겁니다.
우리 거친 돌을 다듬듯이 우리의 악습과 우리의 나쁜 습관, 인성속의 상처들을 닦아 없애합니다.
물은 그 자리에 있으면 썩습니다. 흘러 나가야합니다.
세 번째 물은 담수(潭水)입니다.
작은 물줄기가 모여 담수가 됩니다.
신학적 이야기하면 작은 공동체, 더 작게 이야기하면 내 가정일 수 있고, 내가 속한 단체일 수 있습니다.
담수 안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담수에 물체가 떨어지면 그것을 잡아끄는 침수의 기능과 떠받드는 부력의 기능이 있습니다.
내 가정 안에서, 내 단체 안에서 나는 과연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는가 아니면 떠받드는가?
부력의 역할을 하는 사람의 입에서는 항상 칭찬이 나옵니다.
그리고 늘 위로 격려하려고 애쓰고, 상처를 이유해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침수의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남보다 조금 잘나고 멋있는 사람을 보면 헐뜯고 비난하고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담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떠받들어 주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호수(湖水)가 있습니다.
담수보다 큰 공동체, 본당이나 교회를 뜻합니다.
본당 안에 있어야하는 향기는 평화의 향기이지만 그렇지 못한 본당이 너무나 많습니다.
신자는 신자대로, 목자와 양은 헤어질 날만 기다리고 서로 피를 흘리며 삽니다.
평화가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뿌리가 없거나 약한 것이지요.
즉, 출발점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고, 그냥 상대의 반대를 위해 삽니다.
그리스도의 출발은 바로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 영적인 물로는 용수(用水)가 있습니다.
담수와 호수는 반드시 유용하게 쓰여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대로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고 그 분의 손안에서 작은 도구가 되어야합니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나귀보다 고집이 셀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늘 예수님이 원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예수님을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다른 말로 베드로를 쓰시겠답니다. 마리아를 쓰시겠답니다. 회장님을 쓰시겠답니다.
“예, 쓰십시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여섯 번째 영적인 물은 정수(淨水)가 있습니다..
당신의 협력자로 쓰시기 위해 우리가 정화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피정, 고해성사, 성서읽기, 혹은 성체를 가까이 하기 등의 정화의 기능이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될 때,
우리는 더러운 물이 아니라 자정능력이 있는 깨끗한 정수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일곱 번째로는 약수(藥水)가 있습니다.
약수는 제작기 효능이 다릅니다. 유황이 많은 약수도 있고, 철분이 많은 약수도 있고.
각기 다른 탈랜트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웃을 위해주는 것이 우리가 탤런트를 받은 목적입니다.
하느님에게 받은 그 탈랜트는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쓰여져야 할 약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