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인간이 토라지는 일이 없도록 무진 신경을 써서 마련하신 하느님의 신방이다.
사람이야말로 그분의 질투 대상이요, 까만 밤을 하얗게 새우며 신음하는 상사병의 원인이다. 당신 품을 떠나는 사람들을 찾고, 또 찾고 그리고도 또 찾아 헤매는 하느님이시다. 포기해야 하리라는 순간에도 “한 번만 더” 하면서 마음을 고쳐 잡는 하느님이시다. 그 장면이 성서 구석구석에서 묻어나고 있지 않은가. “아담, 너 어디 있니?” 그 분의 음성이 동산을 울렸다. 그 음성에는 사랑했던 자를 잃어버린 분의 고통이 실려 있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니?” 할 일 많은 터에 밤낮 싸움질로 허비하는 안타까운 삶에 그 분의 애가 닳는다. “토마야 너는 어딜 갔었니?” 라고 묻는 예수님의 가슴에는 한없는 서러움이 깃들어 있다. 사람들마다에게, 민족들마다에게 묻고 실망했던 하느님이시다.
이룰 수도 없는 사랑의 꿈으로 결국 괴로워하는 것은 분명 그분의 모순이다. 그러나 사람이 없는 하느님은 까닭 없이 공허하고 더 아플 뿐, 다른 수가 없다, 인간 때문에 고독한 분은 하느님이시다. 사랑은 항상 자신을 외현화(外現化)한다. 삼위일체 교리도 인간을 향한 한 분, 하느님의 삼중의 사랑고백이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그리움의 수난역사라 할 수 있다. 그분의 창조적 사랑은 항상 고난을 당하는 사랑이지만 우리에게는 유쾌한 모순이기만 하다. 때로 우리가 그 사랑은 잊고 지내는 때도 있다. 혹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귀찮아서 바로 문턱에까지 온 그분에게 문을 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을 수 없다. 예수님의 고난은 비극과 모순을 감수하면서까지 인간을 붙잡고 사랑애기로 들려주는 하느님의 화해의지의 전부이고 그 표현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애인이다. 하느님의 꿈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대로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그리움 자체이며 그분 사랑의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