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행적 증언자 박순집(朴順集, 베드로 1890~1911)
박순집 베드로는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暑, 조선시대 국가제사 때에 사용될 가축을 키우던 관서, 현 서울 용산구 후암동 지역)에서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 아가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베드로가 세 살 때에 세상을 떠났고, 부친은 기해교난(1839년) 중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베르 주교, 모방과 샤스탕 신부의 시신을 거두어 노고산에 일시 안장하였다가, 4년 후 박씨 문중의 선산인 서울 삼성산으로 이장하였고, 이 사실을 아들 순집에게 일러준 후 1868년 3월 절두산에서 순교(당시 63세)하였다. 박순집은 아버지의 삶을 본받아 병인교난(1866년) 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신부(3월 7일 순교), 프트니콜라와 푸르티에 신부, 정의배 마르코 회장과 우세영 알렉시오(3월 11일 순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승지 남종삼 요한(3월 7일)과 최 형 베드로(3월 9일 순교) 등의 유해를 목숨을 걸고 찾아내어 용산 와고개(瓦署峴)에 안장하였고, 부친을 비롯한 일가(一家) 16명 순교자의 유해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기도 했다. 1876년, 그는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 1877년에는 리델 주교와 두세, 로베르 신부 등의 (밀)입국과 사목활동을 도왔다. 1888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가 프와넬 신부에게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도록 하였을 때, 박순집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여 필사본 ꡔ박순집 증언록ꡕ 1, 2, 3권(이 증언록에는 순교자 153명의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의 간행을 도왔다. 1889년, 그의 증언에 힘입어 와고개에 묻힌 7명의 순교자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1901년에는 삼성산의 세 성직자 유해와 1909년 남종삼, 최 형의 유해를 명동 지하성당으로 옮겨 모실 수 있었다. 박순집은 1890년 서울 홍제동에서 제물포로 이사하여, 1892년 르 비엘 제물포 본당신부를 도와 회장(服事 및 經理 擔當) 역할을 하였고, 1911년 6월 27일 여생을 마칠 때까지 인천지역에 머물며 신앙의 초석을 놓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는 82세에 귀천하여 독쟁이(현 용현동)에 안장되었었는데, 1961년 8월 고 오기선 신부에 의해 절두산으로 옮겨졌다. 2001년 5월 24일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부터 그 유해의 일부를 분할 받아 그분이 사시던 쑥골(현 도화동) 성당을 거쳐, 9월 20일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맞아 이곳 강화 갑곶 성지에 봉안하게 되었다. 여기, 신앙 선조들의 순교 행적과 위명(偉名)을 증언하여 이 땅에 성인 103위를 모실 수 있는 영광을 마련하는 데 한 디딤돌 역할을 한 박순집 베드로 증언자의 삶을 기리며 조촐한 유택을 마련하여 순례 신도들의 신앙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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