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목자는, 우선 양들의 개별 특성을 잘 이해합니다. 어떤 양은 어디가 아픈지, 무슨 풀을 특히 좋아 하는지, 추위에 강하고 약한 양인지, 털은 언제 깎아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착한 목자임을 밝히시며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이름까지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다른 곳에서는 우리들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 두셨다고 하셨습니다(마태 10, 30 참조). 진정 우리는 주님의 양떼이고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에 신뢰를 가지고 따라가면 됩니다.
그런데 현실의 삶은 여러 유혹으로 우리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가정의 여러 불화와 시련이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며, 여러 그릇된 사상이라든가 세속적 가치관이 판을 치는 위험에, 우리들은 늘 노출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토대 위에 착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성실하게 그분을 따르려는 양떼들에게는 여간 혼란스런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로 얼마나 많은 양떼들이, 착한 목자를 떠나 멸망의 길로 이끄는 도둑의 소굴로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둑들의 의도를 밝히시면서, 당신의 목자 된 사명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문으로 들어와 생명을 얻으라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 7; 10).
세상에 넘쳐나는 것이 그릇된 지도자, 나쁜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거의 한결같은 모습으로 양떼들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착한 양떼들을 파탄으로 만들어, 가족 구성원이 화목하게 살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끝내는 양떼들을 멸망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공포감을 조성합니다. 그리하여 ‘저주’, ‘심판’, ‘징벌’ 등의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자주 엄포와 으름장을 놓으면서 신도들을 옭아매고 인간의 가장 소중한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그들은 분명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자유를 사셨던 분이셨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분이셨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억압으로 신음할 때, 당신은 분연히 일어나시어 저항하시고, 당신을 희생하시기까지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신앙을 일깨워 주신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봉쇄 수도원의 높은 담과 교도소의 높은 담의 차이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수도원의 담은 바깥사람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교도소의 담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깥으로 쉽게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문이십니다. 나가지 못하도록 붙들어 두시기 위하여 강제적인 힘을 쓰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문으로 들어 와야, 영원한 생명을 보장 받는다고 하십니다.
문은 열려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문은 안과 밖을 연결시켜 줍니다. 닫아걸고 있는 문은, 분명 그 안에 살고 있는 주인의 어두운 면을 보여 줍니다. 바깥에 있는 이들이, 보아서는 안 될 온갖 악한 소유물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열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밝은 광명의 삶은, 문을 닫아걸고 있을 수 없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두 팔을 벌리고 활짝 열려있는 생명의 문이십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 그분 보호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때, 그곳이 진정 자유가 넘치는 생명의 낙원인 것입니다.
그 같은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교회 역사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안락한 삶의 유혹을 끊고 생명의 문을 선택하였습니다. 세상 것들을 끊고 생명의 문을 선택한 이들은, 결국 많은 것을 잃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생명의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넘치는 영적 기쁨을 혼자 간직하기에는, 터질듯 한 심장의 박동을 누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목자의 뒤를 따르는 삶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오늘 부활 제4주일을 ‘착한 목자주일, 성소주일’로 지내면서, 세상의 많은 젊은이들이,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거룩한 음성에 귀 기울여 응답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의 부르심에 응답해 줄 것을 청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당신 혼자 구원사업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그 옛날 열두 사도들을 뽑으셨듯이 오늘도 당신의 일꾼들을 부르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팔과 다리가 되며, 당신의 마음을 전해 주는 음성이 되어줄 것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생명의 문으로 들어와 그 생명의 기쁨을 체험한 제2, 제3의 착한 목자, 곧 예수님 당신처럼 자신을 투신할 목자를 찾고 계십니다.
진정한 착한 목자는 양 한마리 한 마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 양들을 극진히 사랑하기에 양들도 그 사랑을 알고 신뢰하는 사람, 결국 양들을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존재 그 자체로, 함께 있다는 그 사실 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목자,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구원의 향기를 퍼트리는 목자, 실의에 빠져 고통 받고 있는 양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는 목자, 그래서 삶의 이정표를 잃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새 출발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런 목자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아울러‘성소주일’은 사제 성소자나 수도 성소자만의 날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의 날입니다. 그러기에 구체적으로 걷는 길이 어떠한 것이든, 모든 신앙인은 특별히‘성소주일’에 자신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내면을 깨끗이 치워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소주일’은 모든 신앙인에게‘청소주일’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주변에는 착한 목자들이 많이 계십니다. 온종일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런 착한 목자와 함께 길을 걸어가는 신자들 얼굴에서는 행복이 묻어납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이와 같은 착한 목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는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청해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