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은 몸소 제자들을 찾아가시어 그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시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당신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곳에 있는 모든 이에게 당신 손의 못자국을 보여 주십니다.
이러한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부분에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진하여 “손과 옆구리”(20절)를 보여주시고, 토마에게는 그 옆구리의 상처에 손을 넣어보라고 하신다(27절). 십자가에 돌아가신 같은 분인데, 그분의 존재 양상은 바뀌었습니다. “문이 잠겨있었는데도”(19절) 제자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생명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제 당신이 들어가신 영광, 생명의 보증인 평화와 성령의 선물을 제자들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평화가 너희와 함께!”(19.21.26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말씀입니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자신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하느님께 완전히 의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이 그 두려움을 없애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없게 하는 ‘평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첫 선물입니다. ‘평화’는 구원의 선이 충만한 상태이며, 여기서 신앙인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이 평화의 선물 때문에 파스카는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 현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선물인 것입니다. 현재에는 평화를 주시고, 미래에는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해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이어서 믿음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옛말에‘백문이 불여일견(百聞以 不如一見)’이라 했습니다. 이는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이며 대원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논리만으로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눈 대신, 마음으로 보며 귀로 들으면서 눈을 가진 사람보다 훨씬 더 깊이 보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관을 통해 보는 것은 잠시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눈은 나를 속일 수 있지만, 마음은 속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도 마음으로 깨닫게 되며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뜻이 됩니다.
토마스처럼 두 눈으로 보지 않으면 결코 믿지 못하겠다며, 세상 논리를 고집하는 사람은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고,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도 없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야, 선행을 베풀어 서로 도와주며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행복과 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갖가지 시련이 남아 있고 아직 견디어 내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초기 교회 때에는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믿고 있는”(1베드 1,8) 그리스도인에게 무서운 박해가 있었습니다. 황금이 불로 단련을 받듯이, 시련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순수해졌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갖가지 시련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욕심이 남아 있고, 주님을 믿고도 허전한 마음 때문에, 세속적 욕심을 채우려하는 현혹적인 것을 찾으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한 토마스에게 ‘행복’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신명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행복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평생 동안, 자문해 보는 핵심적인 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복음은 그 신명나게 살아가게 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게 해 주는 원천이, 바로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과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분이심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확인 절차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토마스를 보면서, 매순간 우리 안에서 용솟음치는 욕심과 욕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곁에 모시고도, 우리가 욕구하고 있는 것은, 겨우 육신의 보잘 것 없는 만족을 위한 탐욕을 쫓는 것은 아닌지요? ...
부활의 기쁨 속에 살았던 초대 교회 신자들은 그야말로 복음을 실천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삶에는 기쁨과 행복이 묻어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의 기쁨은, 그분의 부활 때문에 내가 예전과 같을 수 없음을 체험하는 것에서 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이전에 추구하던 것을 계속 추구할 수는 없고, 이전의 삶을 그대로 지속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당신이 걸으셨던 광야, 혹은 십자가 희생의 길로 용감하게 갈 수 있도록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지불식중에 그분의 부활을 만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던 모든 것들을 그렇게 잃게 될까봐 불안해하며, /그분의 부활은 기뻐하면서도 나를 건들지는 말라고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추구하며 살아오던 옛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해보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뀐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우리 힘만으로는 이렇게 하나뿐인 삶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결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내적인 변화가 이미 그분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도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처럼 자신들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병사들에게 돈을 주고 그분의 부활은 거짓이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곧, 하느님은 모르실 거라고 착각하며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세속적인 부와 명예와 권력의 삶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그분 섭리에 맡겨야 하는, 주님께만 의탁해야 살 수 있는 광야에서의 삶을 살고 있다면, /이것은 예수 부활을 위한 어떤 사람들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을, 우리 그리스도인이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변하는 것이 가장 큰 부활의 증거입니다. 죄를 더 이상 짓지 않으려 하고 악을 멀리하게 된 것, 이전에 추구하던 것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집착하지 않게 된 것, 등등 이러한 것이 부활의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머리로 믿고 이성으로는 받아들이며 마음으로는 함께하면서도, /실상 행동과 삶에 있어서는 부활의 진정한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혹시라도 국외자처럼 기웃거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성찰해 봐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기에, 참으로 부족한 신앙을 가진 우리 자신이지만, 우리의 미소한 믿음을 겨자씨 만큼이라도 굳건하게 하여 달라고,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께 겸손되이 간청해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