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금요일 오후 3시경 주님께서 골고타 언덕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당하실 때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넘겨주다”(그리스어 paradidonai, 라틴어 tradere)라는 동사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공관복음에서는 게세마니에서 핏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자고 있던 제자들에게 세 번째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 간다(traditur Filius hominis).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me tradit) 자가 가까이 왔다” (마르 14,41-42).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물건처럼 넘겨지셨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도 예수님을 이미 수석 사제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마태 10,4 참조).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똑같은 단어가 유다 뿐 아니라 하느님께도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넘겨주신 tradidit illum)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 8,32).
그래서 “넘겨주다"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 역할을 합니다. 이것에서 예수님의 삶이 철저히 둘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첫 번째 부분은 능동적인 행동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주도권을 갖고 계셨습니다. 말씀하셨으며 선포하셨고 치유하셨으며 여행도 다니셨습니다. 그러나 넘겨지자마자, 어떤 일에서든 철저히 수동적인 분이 되셨습니다. 대제관과 빌라도 앞에 끌려가셨고, 매질을 당하셨으며, 십자가를 지고 끝내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수난과 죽음의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어졌다” (요한 19,30)고 외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는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원없이 다했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에는 “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나에게 행해져야 하는 일이 나에게 행해지도록 허락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능동적으로 허용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다림의 신비를 보게 됩니다. 남이 나에게 행동하도록 기다리는 것, 이것이 수난의 신비이며, 더 나아가 죽음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의지, 하느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드님을 통해서 고집이 센 우리에 대한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남의 손에 넘겨지시고 목숨을 바친 것은, 죄많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에 불타는 예수님은 사랑 안에 당신을 봉헌하셨습니다. 사랑할 적에 누구나 바보가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면은 그 사람밖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적에 누구나 장님이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 외에는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적에 누구나 귀먹어리가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 목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보요, 장님이요, 귀먹어리가 되셨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다른 사람의 뜻에 내맡기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아프고 지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드니까 그만 해야지. 아프니까 그만 해야지. 지치니까 그만 해야지’ 되뇌입니다. 그러나 말로만 하면 뭐합니까, 생각만 하면 뭐합니까. 이미 심장은 사랑해 버린 것을, 아파도 힘들어도 사랑하는데 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심장에 새겨진 사람은 아파도 힘들어도 지쳐도 사랑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선포합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