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의 창세기는 일찍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부터‘죽음’이 비롯되었음을 전해줍니다. 그 범죄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과, ‘하느님처럼 될 수 있을까?’하는 교만의 허상에 휩쓸려 뱀의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며 부르실 때, 아담과 하와는 그분 앞에 예전처럼 나설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피하고 숨는 순간, 인간에게는 죽음의 어둠이 들이닥쳤습니다.
‘죽음’이 가져오는 두려움과 슬픔,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고뇌와 어려움도 죽음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음에 대하여 적극적인 해결책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고통이 두렵고, 그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르며, /무엇보다 지금 살아 있을 때 가졌던 것들을, 모두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죽음 그 이후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는‘단절된 느낌’이 가져오는 혼란스러움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그와의 단절과 사별 때문에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죽음에 처하셨습니다. 곧 죽음을 극복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구원을 체험하게 해 주셔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으며, 과부의 외아들의 경우에는, 당신 스스로 애처로운 연민을 느껴 외아들을 다시 살게 하는 선물도 주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생명이신 하느님에 대한 굳걷한 믿음과 그 믿음에 대한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하신 예수님의 외침은, 마치 태초에 세상을 만드실 때 혼돈을 물리치셨던 성부 하느님의 창조 말씀처럼 울려 퍼집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어둠의 동굴 속에 머물지 말고, 환한 빛의 세계로 나와 살아가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같은 무덤 속 어둠 속에 파묻혀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빛으로 나와 대명천지 안에서 투명하고 성실하게 인생을 향유하며 살아가라는 뜻으로, 묵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옭아매었던 죽음이라는 존재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힘없이 뒤로 물러날 뿐입니다. 마음속에 죽음과 상실에 대한 근심과 공포가 깊이 자리해왔던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힘을 얻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가릴 줄 알게 되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은 차분히 제자리를 찾습니다. 단절되었던 것들은 다시금 생명력을 되찾아 함께 숨을 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세력 앞에서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돌무덤을 부수고 빛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신앙에 의한 결실입니다.‘죽음’,‘고통’과 같은 것은‘다시 살아남’, 곧 부활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며, 예수님의 결정적인 사랑이 드러나는 계기입니다. 우리 모두 동굴 속 어둠에서 벗어나, 밝고 투명한 빛의 세계에서 주님과 함께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