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볼 수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태생 소경이 분명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선한 행위를 했다’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 계명을 지켰느냐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반대로 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진정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태생 소경은 비록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빛이요 구원 그 자체임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서 욕을 먹고 죄인으로 취급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눈이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잣대로 보려 하기 때문에, 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조상의 탓도 아니고, 본인의 탓도 아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사람이 아프거나 병드는 것이,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앞을 보지 못한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축하할 일입니다. 가족들에게도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전혀 다른 생각으로, 소경이 눈을 뜬 것이, 신학적으로 합당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독화살의 비유와 같습니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으면 먼저 치료하여, 속히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화살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누가 쏘았는지를 먼저 따집니다. 왜 화살을 쏘았는지를 생각하는 동안에, 화살에 맞은 사람은, 독이 온몸에 퍼져 죽을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제1독서에서도 예언자는 주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해 주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의 외모와 능력,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지만,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신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만의 우물 안에 갇혀, 큰 그림의 생각을 하지 못하고, 편견과 독단과 아집과 이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그런 나 자신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몸이 있어도 참된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봅니다.
그러기에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의 눈, '심안(心眼)'을 요구하십니다. 곧 참으로 들을 수 있는 '지혜'를 요구하십니다. 눈을 들어 이 세상을 보면, 참으로 보지 못하고, 참으로 듣지 못해서 눈과 귀가 있으면서도, 그릇된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 욕하고 비난하며 인격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사실 세상에는 여러 소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운 사람만 소경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재력에 눈먼 사람은 돈만 보이고, 도박에 빠진 사람은 베팅하는 것만 보이며, 권력에 미친 사람은 권력만 보일 것입니다. 이렇듯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소경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무엇을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째로는 인간이 나를 내세우면서 자기 안에 갇혀서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눈이 먼 사람을 보게 해주신 기적을 면전에서 분명하게 베풀었는데도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주님의 기적과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또 그래서 그 은총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기 아집에 사로잡혀 주님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말을 듣고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좋은 마음과 의도를 헤아려주십니다. 사람들은, 눈이 멀었던 사람이,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분이라고 증언하자, 그를 회당에서 쫓아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몸소 찾아가십니다.(35절 참조) 이런 모습은 오늘 제1 독서에서, 사무엘이 주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왕을 뽑을 때도 언급합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주님은 속마음을 들여다본다.”(1사무 16, 7)
셋째,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앙에 대해 물을 때, 우리 스스로 신념을 가지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확실한 체험을 말할 수 있도록, 신앙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그 장님의 부모조차 자기들이 다칠까봐, 진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고,“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시오.”하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할 기회를 피해갑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눈멀었던 사람은, 과감하고 명확하게 대답했습니다.“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17) 그 장님은 눈을 뜨면서, 분명하게 주님을 알아 볼 수 있게 되어, 그렇게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거짓과 가식과 허영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를 보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참된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희망과 평화, 진실과 사랑이 한데 어울려 참된 빛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기 전에, 저 땅속에서 쉼 없이 양분과 물을 찾고 있는 뿌리를 볼 수 있다면, /깨끗한 거리를 보기 전에,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볼 수 있다면, /일등에게 축하를 보내기 전에, 꼴등에게 위로와 격려를 먼저 할 수 있다면, /용서받기를 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에서 벗어나 이미 빛 속에서 앞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참회와 절제, 자선의 사순시기도 벌써 반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난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보기 싫어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남은 사순시기를 보람 있게 지내며, 주님 부활을 준비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