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이론 중에는, 작은 물질이라도 그것을 없애면, 큰 에너지로 변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론은 반대로, 큰 에너지가 작은 물질로 변할 수도 있다는 이론입니다. 물질이 변해서 에너지가 되는 것이 원자폭탄이라면, 에너지가 변해서 물질이 되는 것이 창조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으로 눈에 보이는 우주물질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질들은 길고 긴 시간 동안, 진화를 계속하여 지금의 동·식물이 되고 인간도 되었습니다. 동·식물과 달리 인간은 기술문명을 발전시켜왔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문자와 음악과 동영상이 허공에 가득 떠다니고, 뇌파만으로 컴퓨터를 작동하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생각하는 대로 실재가 되는 세상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므로 단순히 그런 발전이 행복을 보장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인류는 굶어 죽는 사람도 많으며, 언제든지 스스로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기술문명이 발전하여 우리 몸은 편해졌다지만,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완전함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그 완전함은 무엇입니까? 그 완전함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마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긴 세월의 진화에 성공해서 지금은 편리하게 생활하며 다른 동·식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원하시는 완전함에 이르려면, 다른 측면의 진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즉 마음의 진화가 더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또한 “사람은 나이가 들면, 곱게 늙어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시간이 지나면 늙어가는 그 육체를 통해서,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진화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신을 계속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진화를 멈추면 도태되고 죽습니다. 마음의 진화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며, 그것을 멈추면 영혼이 죽게 됩니다. 내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걸어가 주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고통이 따릅니다. 자비를 베푼다는 것도 나의 손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과 손해를 극복해야만 우리 마음은 진화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완전함을 향해서 진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완전함에 이르는 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과 손해의 멍에를 지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그 길을 먼저 가셨습니다. 우리도 그 길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완전함에 초대받은,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축복 받은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스며있는 성전인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선과 악을 구분하여 칭송과 단죄를 하기에 앞서, 사랑을 먼저 실천하고 보여 주어야 합니다. 모든 지혜와 현명함은 사랑 없이는 위험한 도구입니다. 사랑만이 모든 것을 완성하고 참 인간이 되게 합니다.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주로 자신이 받은 상처와 피해를 생각함에서 오는 것이며, 미움과 다툼은 그 피해를 되갚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깁니다. 마음 속 욕심이 커지면, 미움도 커지고, /상처와 피해의식이 클수록 미움이 쌓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희생으로써 변화와 성숙을 기다려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보겠습니다. 희생 없이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희생으로서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진수는 사랑입니다. 인류의 모든 문제와 갈등, 분열과 싸움은 바로 이 사랑의 결핍으로 기인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해주고 인정해 주면서 존중해 주면, 야기될 수 있는 갖가지 어려움과 비극을 피하거나 막을 수 있습니다. 용서는 생명을 낳고, 일치는 기적을 낳게 됩니다. 반대로 미움은 죽음을 낳고, 분열은 멸망을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인류에게 부족한 사랑을 설파하셨고, 직접 당신 생애를 통해 사랑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단순한 피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심지어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아는, 지고의 사랑을 선포하시고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고 잘해주며, 원수를 위해 희생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나 사이에 하느님을 개입시켜, 동등하고 같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도 용서와 은총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가족 안에서든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든, 사랑이 넘쳐나면, /그 공동체와 집단은 누구든지 보다 머무르고 싶은 곳이 되며, 각 구성원 개개인은 각자가 받은 재능을 더욱 발휘하게 되고, 정신적 물질적 헌신과 기여를 보다 꽃피우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죄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서, 보복과 앙갚음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을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자신,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도, 이웃을 진정으로 더욱 사랑하는 삶을 영위하도록, 주님께 지혜와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