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강론>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초기 신앙인들이 행한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서, 곧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을 나타냅니다. 어린양이란 죄인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기 위한 제물로서, 유대인들은 이를 희생제물, 대속제물이라고 불렀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당신 십자가 죽음을 통해 전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 이사야서에는, 하느님“야훼의 종”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스스로는 죄가 없으면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벌을 받는 인물에 대한 말입니다.“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예언서가 이“야훼의 종”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 이렇게 나옵니다.“그는 ...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기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53,7).
이 야훼의 종은 곧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데, 우리 죄에 대한 대가(代價)이며 속죄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10장에는 예수님께서“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의로우시고 엄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죄를 심판하신다면, 구원될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묻지 않으시고, 당신의 성자를 우리 대신 속죄물, 곧 속죄양, 희생양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법치국가의 상황에서는 각자의 부채나 대출 비용과 몸값을 누가 대신 지불하는 관행이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2000년 전 예수라는 한 인물이 십자가에 죽어서, 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고 말하면, 현대인은 잘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 죄를 대신 갚아 주신 덕분으로, 우리가 구원 받게 된 것입니다. 노예나 전쟁 포로를 해방시키려면 그 몸값을 지불해야 하듯이, 성자께서 우리 죄인의 속죄와 해방을 위해 그 몸값이 된 것이었습니다.
어린 양이라는 이 용어는 현대인의 언어 안에서도 속죄양, 희생양이라는 개념으로 정착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타임 잡지에서도 희생양 scape goat 라는 표현이 적지 않게 나옵니다. 이 용어가 바로 오늘 복음의 개념에서 유래된 표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언니나 오빠가, 동생들을 위해 대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생계를 위해서든 학자금 마련을 위해서든, 일찍 취업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희생양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든 사회 안에서든,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그 공동체는 유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많은 인류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 인류를 희생시키기보다 당신 외아들이신 성자를 희생시키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에도 거론되듯이,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시는데, 도대체 무엇을 더 아끼시겠는가하는 결론으로 연결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원하거나 청할 줄도 모르는 것이지만, 필요한 것이라면, 미리 미리 챙겨주시고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놀라웁게도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 기적을 행하실 때, 그 전제 조건으로 곧잘 죄의 용서를 언급하셨던 것입니다.“너의 죄가 용서 받았다. 다시는 죄짓지 말라,”등등의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죄를 없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은총과 기적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죄를 씻어 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으로서의 어린 양을, 오늘 복음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은총이 필요하다면, 우리 죄를 없이 하시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 도움을 간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개인과 민족 공동체의 부족하고, 혹시라도 하느님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면, 자비로이 용서해 달라고 겸손 되이 청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실의에 찬 병자들, 절망에 빠진 불구자들을 고쳐 주시면서, 하느님은 사람을 단죄하고 벌주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오히려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굳건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하느님의 어린양”은, 자비를 우리에게 베풀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가난하고 겸손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어,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치른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맏형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어린양이 되어 희생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나는 과연 얼마나 스스로 어린양이 되어 우리 주위의 가난한 이웃이나, 친척이나, 지인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도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그저 사랑으로, 기쁜 마음으로 좀 손해보면서 작은 희생이라도 치를 수 있을까요? 규모가 크든 작든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또 한 번의 선행이 되고 은혜가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진정한 구세주로, 메시아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증거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곧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어린 양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린 양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고통 받는 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21세기 어린 양의 모습을 전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흐르는 세월에 마디가 있겠습니까마는, 어느새 한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해를 살게 되는 것은, 시간을 축복하시는 하느님의 선물임을 확인하면서,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 그분과 또다시 새롭게 살고자 다짐할 수 있는, 은총이며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을 더욱 온전히 본받아서, 우리 자신도 하루 하루 주어진 삶 안에서, 보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며, 보다 축복 가득한 삶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