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강론>
성탄 시기에 우리가 묵상하는 ‘동방박사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신비스러운 내용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요즘으로 따져보면 과학자, 더 구체적으로는 천문학자인 듯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과학의 세계는 실재하는 모든 자연 현상을 관찰, 실험, 분석하여 그 안에 있는 보편적인 원리를 규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성의 진리를 찾던 박사들이, 어떻게 유다인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을 알아보는 신앙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동방박사들이 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의 비가시적인 초월적 존재를 인식하고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궁극적인 구원과 행복을 가져다 줄 구세주의 존재를 깨달았기에, 그 위험하고 힘들기도 한 머나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동방에서부터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박사들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요한 1,14)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나선, 구도자요 순례자의 전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선택된 백성인 유다교의 지도자들과 예루살렘 시민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척에, 오랫동안 고대하던 구원의 메시아가 태어난 것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였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천 년 역사동안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핍박과 고통의 삶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메시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구세주인 예수님께서 태어난 것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들은, 머나먼 동방의 이방인들이었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주 먼 곳에 있었지만 그분의 별을 보았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나요? 오히려 곁에 있던 유다인들은, 그분의 별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인 동방박사들은 멀리서도 볼 수 있었던 그 별을 유다인들은 왜 못 보았을까요? 혹시 너무 가까이 있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욕심에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거나, 그분의 별을 찾는데 게을러졌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현세적인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즉, 자기 나라와 백성을, 주변의 강대국들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는, 힘 있는 군주를 더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처럼 작은 고을에서 태어난 어린 왕자이신 그분, 힘없는 사람들을 섬기러 육화한‘연약하신 하느님’그분을, 거부하고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엄연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편협하고 단편적이며 이기적인 가치관을, 진리의 척도로 삼아 고수하려는 모습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들의 눈먼 비극을 다시 보게 됩니다.
유다인들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드러납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복음의 정신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얼마나 세상일을 관찰, 판단하고 실천하고 있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다분히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보다는, 이기적이며 물질적인 관점에서 사람을 보고, 외양적이며 표피적인 것에만 집착하여 현실을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의 별이 가까이에서 빛나고 있어도, 눈먼 장님처럼 발견하지 못한 채, 인생을 대충 살고 있지나 않는지 되새겨 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분의 별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태어나실 곳, 베들레헴은 바로 우리 가까이 있는 이웃 안에서입니다. 어렵고 힘들게 살면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 가운데에서, 예수님은 탄생하셔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주님의 별을 찾듯이, 우리도 무수한 별들 중에 그분의 별을 찾아야합니다. 물론 저절로 찾을 수는 없습니다. 동방박사들처럼 많은 수고와 노력이 따를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다행히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진리요 길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우리가 찾기만 하면, 주님께서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의 별을 보고 그분을 따라간다면, 구원과 생명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노력을 통해서, 결국 우리 자신도, 한 사람 한 사람, 다른 이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그분의 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올 한해 나와 이웃 안에서 그분의 별을 자주 발견하고, 그분의 별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에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그분의 별이 되시기를 빕니다. 아멘.
<해설자>
서울역 양동의 동방 박사들
지금으로부터 30년은 되었을 것입니다. 대학생 시절 어느 해 겨울 방학에 가톨릭 학생회 주관으로 서울역 앞 양동에서 봉사체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양동에는 몇 분의 수도자들이 그 지역에 거주하며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도자들도 처음에는 그곳 사람들의 텃세에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자취조차 없어졌지만 당시 서울역 앞 양동에는 해방이후 형성된 유곽이 즐비했고 판자를 세워 지은 집들이 가득했습니다. 걸인, 거리의 여성, 고아, 장애인들도 많이 살았습니다.
양동을 처음 찾았을 때 ‘서울에 이런 곳도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받고 버림받았으며, 가난과 병에 지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작은 희망조차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수도자들이 이들의 벗이 되어 함께 살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는 양동에서 만난, 맹인 할아버지가 한 말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나는 하느님이 누군지, 정말 계신지도 잘 몰라. 그런데 수도자들이 우리들 곁에 와서 우리들을 위해 사시는 것을 보면, 하느님이 계신 것 같아. 수도자들이 믿는 하느님이니까.”
그 당시 양동 사람들에게 수도자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구세주의 별을 알려주는 동방 박사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상생활 안에서 바로 그분의 별을 보고 따라가는 동방 박사가 될 때, 그러한 우리를 보고, 다른 사람들도 주님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멘.